
아무도 모르는, 그 남자의 《시작의 날》을 그린
프로그레시브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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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제1화
"…이게 《아인크라드》군."
끝없이 펼쳐진 푸른 하늘에 순백의 구름, 형형색색의 화초, 뺨을 어루만지는 산들바람, 다소 고풍스러운 거리와 발바닥으로 전해지는 돌바닥의 감촉.
모든 것은 뇌에 전송된 디지털 데이터에 불과하다는 것을 다시금 의식하려고 해도, 여전히 게임 세계라고는 믿기지 않는다. 그만큼 생생했다.
그렇군. 과연 최첨단 과학 기술이야. 하지만――
이건 역시 만들어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공기는 토사물과 더러운 물, 배설물의 악취로 가득하고 도로에는 쓰레기와 오물이 어지럽히고 있으며 건물 벽은 낙서로 가득하고, 소란스러움이 끊이지 않고 일상적으로 고함과 비명이 울려 퍼진다.
적어도 그가 열다섯 살까지 자란 세계에서는 향수 같은 감정 따위는 품을 수 없는 그런 광경이 당연한 것이었다.
이 《시작도시》에는 그런 현실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설계자의 의사를 토대로 만들어진 고의적인 청결함. 말하자면―― 그렇다. 《거짓》으로 가득 차 있다.
바사고 카살스/PoH는 어떤 비합법조직에 소속된 암살자이다.
데스 게임의 무대가 된 《SAO》에는 현실 세계에서 손댈 수 없는 표적을 처치하기에 알맞은 조건이 갖추어져 있다. 그렇게 판단한 조직의 상층부에 의해 이 가상 세계로 보내진 것이다.
하기야 수행자로서는 전혀 쉬운 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을 것이다.
"…흥, 빌어먹을 명령이나 내리는 쪽은 편하고 좋겠네."
그럼 어떻게 된 일인가.
다이브 전에 《SAO》에 대해 가능한 모든 지식을 채워 넣긴 했지만, 그래도 이 게임을 충분히 알고 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카야바라는 미친 게임 설계자가 이 난리를 피운 지 벌써 수일이 지났으니 분명 상황도 여러모로 변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먼저 정보 수집을 해야겠군―― 하며 주변을 둘러보던 그때.
"어이, 거기 당신. 도움이 필요해?"
시원한 말투로 말을 걸어왔다.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두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지금 우리가 받은 건 보상으로 금(콜)을 획득할 수 있는 퀘스트다. 정기적으로 발생하고 내용은 심플한 몬스터 토벌이지. 지정된 장소에 랜덤으로 낮은 레벨 몬스터가 나타나 적당히 해치우면 클리어되는 시스템이야."
초원을 걸으며 장신의 검사가 설명했다.
"퀘스트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처음엔 뭐 이런 것부터 시작하는 게 무난하겠지."
나이는 아마 스무 살 전후인 듯하다. 쾌활한 표정과 곧게 뻗은 등줄기에서 활달한 기질이 엿보인다. 처음 말을 걸어온 이 남자의 표시된 캐릭터 이름은 《Castor》이다.
"솔로로 도전해도 좋지만, 기본 이렇게 파티를 편성하는 게 효율적이야. 쓰러트린 만큼 보상이 추가되기도 하고 말야."
왜소한 남자가 붙임성 없는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
겉보기에 파트너보다 서너 살 어린 것 같다. 다소 가벼운 차림으로 적을 찾거나 척후 성향의 빌드인 걸까.
캐릭터 이름은 《Pollux》.
"아, 그러고 보니 자기소개를 안 했네. 난 카스토르, 이 녀석은 폴룩스야."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쌍둥이 이름이지? 그럼 당신들 형제야?"
"혈연관계는 아니지만 형제라고 할 수 있지. 오랜 기간 파트너였거든. 단번에 페어라는 걸 알 수 있는 좋은 이름이지?"
"…처음 보는 사람한테 잘도 그런 말을 하네. 부끄럽잖아."
"뭘 새삼스레. 이름을 정한 건 너잖아?"
"그러니까 그런 게 부끄럽다고!"
삐친 듯이 말하며 폴룩스는 고개를 홱 돌렸다.
"미안, 까다로운 녀석이지? 그럼 당신은 《PoH》니까… 푸우라고 부르면 돼? 꽤나 귀여운 이름인데?"
"부모님이 지어준 소중한 이름에서 따온 거야."
PoH는 슬쩍 미소를 띠었다. 친근하게 보이도록 계산된 표정이다.
"――그나저나 일부러 파티까지 짜서 퀘스트를 도와주다니 친절하네. 나한텐 고마운 일이지만 그다지 전력에 도움 되지 않는 초심자(뉴비)를 도와서 당신들한텐 무슨 이득이 있지?"
처음엔 어떤 계략이나 사기일 수 있다고 의심했지만 PoH는 그런 생각을 일찌감치 접었다. 그들이 거리의 《범죄 방지 코드 유효 권외》―― 즉, 안전지대를 나서 플레이어끼리 서로 죽일 수 있는 에어리어에 들어가서도 PoH를 전혀 경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두 사람은 PoH가 이빨을 드러내거나 도주할 거라고는 생각하고 있지 않다. 만약 사냥감을 함정에 빠뜨린 거라면 이런 평온한 태도는 취할 수 없을 것이다.
"말을 건 건 당신이 곤란해하는 것 같아서……"
대답한 건 카스토르였다.
"하긴 단순히 친절한 마음이 전부는 아냐. ――이봐 PoH, 당신은 《시작도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어떻게라니?"
작위적인 느낌이 역겹다는 것이 솔직한 감상이지만, 아마도 원하는 대답은 이런 게 아닐 것이다.
조금 생각한 뒤 PoH가 입을 열었다.
"……활기가 없어."
"맞아."
같은 생각이었던 건지 카스토르가 수긍했다.
"죽음의 공포로 꼼짝 못 하게 된 플레이어도 아주 많아. 베타 테스터를 중심으로 앞선 무리도 있지만 수는 많지 않지. 아무리 그래도 그들끼리 이 게임을 끝내는 건 힘들 거야. 태세를 다시 정비해야 해."
"응? 그 말인즉슨, 당신은 플레이어들을 모아서 클리어하겠다는 거야?"
"리더가 돼서 잘난척할 생각은 없어. 하지만 가능하다면 모두 함께 클리어를 목표로 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러려면 먼저 플레이어의 실력을 향상시키고 싶어. 그러니… 모두 기력을 되찾고 만연해진 체념을 없애야 해."
"쓸데없는 참견 아냐?"
폴룩스가 나직이 말했다.
"카스토르는 모를지도 모르지만, 인간이란 아무래도 긍정적일 수 없어서 그냥 내버려 두길 원하는 기분이 들 때도 있어."
"그야 그럴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손 놓고 있어봤자 아무것도 안 바뀌잖아? 반대로 움직일 수 있는 녀석들이 늘어 그중 조금의 무리라도 클리어를 목표로 한다면 공략조가 더 단단해질 거야."
"그래서 난 가망 있다고 판정된 건가?"
"맞아. 거리에서 곤란해하고 있었다는 건 적어도 스스로 움직여서 뭔가 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었다는 거잖아? 그렇다면 도와줄 가치가 있지. ――자, 곧 목적지에 도착해." -
제2화
제2화
보이는 인상대로 폴룩스가 적을 찾고 카스토르는 전투와 역할 분담을 맡고 있는 것 같았다.
특히 카스토르는 뛰어난 솜씨로 곤충형 몬스터 몇 마리를 혼자 힘으로 무난하게 쓰러뜨려 보였다.
"…또 전부 독차지하네. 가끔은 나도 싸우게 해달라구."
"좀 참아봐. 때가 되면 내가 지시할 테니. 원래 전투라는 게 먼저 레벨을 높이고 스테이터스를 올려서 싸우는 게 안전하잖아? 아무래도 목숨이 걸린 일이니까."
"아, 알고 있어. 하지만 너도 위험한 건 마찬가지야."
"난 강하니까 괜찮아.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자구."
웃는 얼굴로 일축해버린 카스토르 때문에 마지못한 모습으로 폴룩스는 입을 다물었다.
전투에 참가하지 않는 플레이어는 그만큼 전투 경험치도 얻을 수 없다. 폴룩스의 불만은 아마 이런 데에서 기인한 것이리라. 그러나 파티용 퀘스트의 클리어 보너스 경험치는 모두에게 제대로 분배되므로 전투만이 레벨 업의 수단은 아니다.
덕분에 카스토르의 전투를 구경하던 PoH도 경험치를 받을 수 있다.
"내가 너희에게 제공할 수 있는 대가는 아무것도 없어."
"괜찮아. 앞으로도 협조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당신은 당신이 좋아하는 걸 하도록 해. 전투를 벌이든 생산직을 맡든 원하는 것을 발견하면 생존할 수 있는 힘이 돼. 아까도 말했지만 그런 녀석이 늘어나면 분명 뭔가 달라질 거라고 생각하거든."
――진취적인 생각이군.
조금 비아냥거리는 감상을 품으며 PoH는 속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적어도 《일》때문에 이 세계에 온 자신에게는 관계없는 이야기이다.
"…숲에서 또 한 마리가 온다!"
그때, 폴룩스가 긴장한 목소리로 고했다.
곧 카스토르와 PoH의 시야에도 식물형 몬스터의 모습이 들어왔다.
"――《리틀 네펜트》? 퀘스트 타깃이긴 하지만 처음 보는 몬스터야."
그렇게 중얼거리며 카스토르는 검을 빼 들었다.
"한판 붙어볼게. 보상이나 몬스터 정보는 많을수록 좋잖아?"
"그렇다면 나도――"
"두 사람은 여기서 잠깐 대기해줘."
"…또야? 상대는 한 마리뿐이잖아. 나도 싸울 수 있어."
"PoH를 혼자 내버려 둘 셈이야? 커서 색으로 봐선 적의 레벨이 높지 않아. 번거로운 특수 공격이라도 갖고 있다면 재빨리 도망쳐 올게."
그대로 카스토르는 몬스터 쪽으로 향했고, 남겨진 폴룩스는 작게 혀를 찼다.
《리틀 네펜트》는 어린아이만 했다. 약간 세로로 긴 항아리 모양의 몸통 윗부분에는 큰 입이 달렸고, 그 위의 머리(?)를 장식한 듯한 둥근 열매가 달려있었다. 수많은 뿌리를 이용해 능숙하게 이동하지만 움직임 자체는 대처하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지 않다.
주요 공격 수단은 양팔인 담쟁이덩굴이었다. 아직까진 카스토르가 잘 처리하고 있는 것 같았다.
"…………"
폴룩스는 어딘가 기분 나쁜 듯 전투를 바라고 있었다.
PoH는 잠시 생각한 후 그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혹시 네가 카스토르를 이 게임에 끌어들인 거야?"
"――――!"
폴룩스는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PoH를 바라봤다.
"뭐? 왜, 왜 그런 생각을……?!"
"아니, 딱히 확실한 근거가 있는 건 아니었어. 실제로도 꽤 친한 것 같은데, 왠지 당신에게서는 부자연스러운 부담감이, 카스토르에게서는 지나친 배려가 느껴졌거든. 내 말이 맞나보지?"
"…………"
《리틀 네펜트》는 그 큰 입에서 연두색 액체를 뿜어냈다. 아마도 고유의 특수 공격일 것이다. 하지만 카스토르는 이 공격도 민첩하게 회피했다.
폴룩스는 파트너 쪽으로 시선을 돌려 이윽고 띄엄띄엄 말을 꺼냈다.
"…동네 소꿉친구야. 엄마들끼리 친구거든. 그야말로 형제나 다름없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냐. 옛날부터 형 노릇을 하는 녀석이었으니까."
카스토르는 어릴 때부터 성적이 우수했으며 지금도 명문대에 진학 중이라고 한다. 한편, 3살 어린 폴룩스는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주 결석하는 고등학생이었다.
취미가 게임이라는 공통분모로 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쭉 친분을 유지해오고 있었다.
어느 날, 너브기어와 《SAO》 존재를 알게 된 폴룩스가 가장 친한 게임 동료인 카스토르에게 권했다. 구직 활동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던 카스토르는 처음엔 머뭇거렸지만 폴룩스의 열의에 지고 말았고, 함께 《SAO》로 다이브하기로 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이 사건에 휘말리게 되었다.
"…저 녀석은 단 한 번도 원망하지 않았고, 나를 버리지도 않았어. 나보다 요령도 좋고 레벨도 높으니 더 센 녀석이나 의지할 사람을 파트너로 삼을 수도 있었을 텐데 말야."
――강하고 자상한 이상적인 형. 끈끈하고 아름다운 형제의 연이란 것인가.
무의식중에 PoH는 몸의 왼쪽, 없어진 신장 쪽을 살짝 누르고 있었다.
자신과 이복형의 가는 연결고리.
물론 아바타에는 신장을 수술한 자국도 없다.
"보호받는 건 알아. 고맙지 않은 게 아니야. 하지만… 이러다가 난 평생 이대로일 거야. 속죄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아. 절대 사라지지 않을 열등감을 계속 느껴야 해. 그렇다면――"
차라리 버림받는 게 편할 텐데. 하며 폴룩스는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넌 현재에 안주하고 싶지 않다는 거군."
"아, 으응. 그건 그렇지만……"
"그럼 좋은 걸 하나 알려주지. 너랑 카스토르가 대등해지는 데에 도움 되고 열등감을 해소해 버리는 방법이다."
폴룩스는 복잡한 표정이었다. 의심과 관심이 반반 섞인 듯했다.
"잘 들어. 저 《리틀 네펜트》에는 큰 약점이 있어. 좀 용기를 내서 거기에 충격을 주면 일격에 쓰러뜨릴 수 있어. 계획대로만 된다면 저 녀석도 너를 다시 보겠지. 그럼 대등한 파트너로서 한 발 내디딜 수 있겠지?"
"야, 약점? 정말? 근데 당신이 그걸 어떻게――"
"어떻게 아냐고? …실은 내가 베타 테스터거든."
폴룩스가 작게 숨을 삼켰다.
"눈에 띄거나 귀찮은 일에 휘말리는 게 싫어서 잠자코 있었는데… 너희는 친절하게 대해 주었으니까 소소한 보답을 해야지. ――어때? 계속 들어볼래?"
"…………"
말없이 PoH를 똑바로 바라보던 폴룩스는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
제3화
제3화
공기를 가르는 듯한 절규가 울려 퍼지다 돌연 끊겼다.
"…이제 끝난 건가?"
혼자 안전권까지 퇴피했던 PoH는 허리를 들고 느긋하게 걷기 시작했다.
조금 전 PoH는 폴룩스에게 두 가지 거짓말을 했다.
첫째, PoH는 베타 테스터가 아니다.
물론 베타 테스터만큼의 지식은 어느 정도 갖고 있다. 사전에 조직이 모아온 《SAO》 정보 중에는 베타 테스터를 통해 입수한 것도 다분히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다. 《리틀 네펜트》 정보도 그중 하나였다.
둘째, PoH가 폴룩스에게 알려준 것은 《리틀 네펜트》의 약점이 아니다.
그게 무엇이었냐 하면――
"어? 넌 끈질기게 살아남았구나."
PoH의 시선 끝에 장신의 검사가 허탈한 모습으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다, 당신이군…"
카스토르는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그 표정에 생기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의 강한 의지력과 흔들림 없던 자신감은 이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폴룩스가 갑자기 끼어들어서… 몬스터 머리 부분의 열매를 깼어. 그러더니… 동종의 몬스터가… 셀 수 없을 만큼 모여들어서… 지키지 못했어……"
그렇다. 《리틀 네펜트》의 열매에는 파괴되면 연기가 퍼지며 에어리어 내의 동족을 불러 모으는 특성이 있다. 약점 같은 게 아니라 오히려 악랄한 트랩의 일종이다.
"미안하다.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나도 막지 못했어."
가능한 한 침통한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하며 PoH가 말했다.
"네 싸움을 보고 있는 동안, 아무래도 뭔가 한계를 넘어 버린 것 같아. 자포자기한 듯 고함을 지르며 뛰쳐나갔어. 설마 너를 끌어들여 자살을 꾀할 줄은……"
"…………"
"혹시 짐작 가는 부분은 없어? 잠깐 얘기한 바로는 너랑 같이 싸우는 걸 거절당한 게 상당히 화가 난 것 같았는데…"
"……! 그럴 리가……!"
거대한 몬스터에게 일격을 당한 것처럼 카스토르가 비틀거렸다.
검을 지팡이처럼 꽂아 세웠지만 그래도 몸을 지탱할 수 없어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나, 나는 그저 그 녀석이 위험에 처하지 않게 하려고… 그랬는데… 그게 오히려 녀석을 상처입힌 거라고…? 그래서 나를 끌어들여서 죽으려고 했다고…? 나는… 녀석을 원래 세계로 보내주려고… 그저 그것만 생각했는데… 그럼 나는, 내가 해 온 것들은 대체 무슨 의미가……"
"…………흐음"
방심한 상태로 계속 중얼거리고 있는 카스토르에게 PoH는 마음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떨어져 있던 폴룩스 검을 집어 들어 카스토르의 갑옷 틈으로 아무렇게나 찔러 넣었다.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HP는 0이 되었다.
"이, 이게 무슨……?"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끔뻑이며 카스토르는 사망 이펙트에 휩싸이며 소멸했다. 피를 흘리지 않고 사체도 남지 않는다…… 살인자에게는 그 어떤 실감도 남기지 않은 채 한목숨이 허비되었다.
"처음부터 《열매》가 있는 놈과 맞닥뜨린 불운은 동정할 만하다 해도 말야. ――이건 아니잖아, 카스토르 씨."
PoH는 말과 함께 실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의 분위기를 바꾸고 싶다면 이런 좌절감에 무너지면 안 되잖아. 왜 얼른 일어서지 않는 거야. 희생은 극복해야 의미가 있어."
대체로 PoH와 폴룩스 사이에 어떤 말을 주고받았는지, 《리틀 네펜트》의 실체에 관한 이야기는 어디서 들었는지 등 의심할 만한 점은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그야말로 폴룩스를 부추기고 복수해야 할 상대가 눈앞에 있다는 진실에 도달하는 것도 결코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오랜 세월 네 동생뻘이었던 폴룩스가 내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진실로 받아들이게 되다니. 그 나약한 마음은 진심 실망이야. ――애초에 네가 녀석을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고 평소에 제대로 마주했다면 폴룩스가 내 감언이설에 넘어갈 일도 없었을 텐데."
결국 고결한 이상도 형제간의 연도 간단히 허물어질 뿐인 가짜다.
일부러 이런 방향으로 유도한 것은 자신이지만, 예상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 결말은 기대치를 별로 충족시키지 못했다.
"세상이 가짜라면 사람의 마음도 거짓투성이일까. …아니, 거짓을 벗겨내고 본질을 드러내는 세계라고 하는 편이 적절할까."
어쨌든 일과는 상관없는 일로 시간을 낭비하고 말았다.
――쓸데없는 수고까지 들여서 도대체 뭘 하고 싶었던 걸까, 나는.
자조하는 듯 입꼬리를 내리며… 문득 PoH는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걸 위해 이 세계에 왔으니까.
그렇다면… 《하고 싶은 일》은 뭘까?
카스토르와 폴룩스에게 흥미를 보인 것은 사실이다. 결과적으로는 기대에 벗어났지만, 그래도 그들―― 아버지와 형과 같은 나라의 인간들이 처참하고 무의미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에 상쾌함을 느꼈다.
――다시 해보고 싶은 이 욕구는 그래서일까.
"……다음엔 사람을 더 모아볼까."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치켜 올라 있었다.
그 두 사람을 마음대로 조종한 것처럼 이번엔 더 많은 사람을 움직여봐야지.
그리고 표적은 아니지만 가능한 한 많은 일본인 플레이어를 죽이겠다.
죽음이 바로 문턱에 있는 이 세계는 쉽게 사람의 본성을 드러나게 만들고 그 《거짓》을 파헤쳐 줄 것임이 틀림없다.
유쾌한 예감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한편, PoH는 자신의 안에서 어떤 물음이 생겨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만약, 정말 만약… 구질구질한 놈들 중에서 결코 꺾이지 않는 강인한 의지, 더럽혀지지 않은 진정한 영혼을 발견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런 인간이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대답은 놀라울 만큼 바로 도출되었다.
――나는 그 녀석을 열렬히 사랑해 주겠어.
그래, 몸과 마음을 다해 자신의 손으로 흔적도 없이 부숴버릴 만큼 격렬하게.
이는 분명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갈망, 어떤 세계에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나도 열의를 잃지 않을 마음의 불꽃이다.
자신은 아마 평생 《진짜(리얼)》에 이끌려 집착할 것이리라.
그러고 보니 카스토르는 이렇게 말했었다.
――당신은 당신이 좋아하는 걸 하도록 해. 전투를 벌이든 생산직을 맡든 원하는 것을 발견하면 생존할 수 있는 힘이 돼.
"…재미없는 놈이었지만 그 말만큼은 정곡을 찔렸군."
시스템 메뉴에 표시된 날짜는 2022년 11월 21일.
하고 싶은 일을 찾았다. 《Prince of Hell》의 즐거운 인생이 오늘 여기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두 사람의 유품에서 값나가는 물건을 집어 들면서 PoH는 신이 나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